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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과 고추모종 덧글 0 | 조회 3,405 | 2012-05-07 00:00:00
박세정 (박세정)  



어린이날과 고추모종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박세정




중간고사가 며칠 전에 끝난 딸아이는 어린이날에 친구들과 동물원에 가겠다고 한다. 어린이날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고 했다. 작년까진 그렇게 했으니 이번만큼은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다고 한다.


“내가 인제 어린이도 아니고…….” 중학교 입학을 했으니 청소년으로 분류해달라고 하는 거 같다. 서운한 맘이 들어 아빠와 상의 후 그렇게 하자고 했다. 당연히 아빤 딸아이의 의견을 들어줄 것이다.



어린이날, 아이는 신나게 일어나 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한다. 아침 식사도 신속하게 끝마친다. 그러더니 방에 들어가 제일 경쾌한 복장을 입고 나오며,


“엄마, 갔다 올게.”


짧은 인사를 하더니 현관문을 쾅하고 닫고 사라져버린다. 남편은 어제 장거리 출장을 다녀왔다고 아침에 일어날 기색도 없이 아직 취침중이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람을 맞으며 달력을 보았다. 내일은 시댁을 다녀와야겠고, 다음 주는 친정에 다녀와야 한다. ‘어버이날이 돌아오는데 엄마는 무얼 하고 계실까? 어린이날에 외할머니가 전화를 주곤 하셨는데.....’ 궁금하여 전화를 걸었다. 어제 고추모종을 하고 피곤해서 지금까지 누워있다고 하셨다. ‘아직까지도 엄만 어린이날 즈음에 고추모종을 하고 계시는구나!’ 내 유년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 어린이날을 전후에서 부모님은 고추모종을 하셨다. 그때가 고추모종을 옮기기에 적당한 시기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이날이 공휴일이라 엄마는 아빠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그날을 일부러 택하셨으리라.



엄마는 어린이날 함께 놀아주지 못한 미안함을 특별한 점심으로 대신했었다. 평소 자주 먹을 수 없었던 자장면 혹은 통닭 등으로. 부모님은 이른 새벽부터 밭에 나가셔서 고추모종을 옮기셨고, 우리 4남매는 집에 남아 적당히 오전 시간을 보냈다. 점심에 맞춰 음식이 배달되면 오빠가 밭에 나가 엄마아빠에게 말씀드렸다.


자장면 주위에 부모님과 우리 4남매가 모여 함박웃음을 지으며 음식을 먹었다. 입가에 자장을 묻혀가면서 말이다. 부모님께선 자장면을 조금만 드시고 밥으로 바꿔 드셨다. 아마도 우리에게 더 먹이려고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점심식사가 끝나면 엄마가 상을 적당히 치우고 용돈을 주셨다. 오빠와 내겐 오천 원을 주셨고, 남동생과 막내에겐 몇천 원을 주셨다. 용돈을 받자마다 오빤 “야호”를 외치면서 집을 나갔다. 난 동생들과 남아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연년생인 남동생은 순해서 돈을 가지고 무얼 하려고 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막내 여동생은 아직 혼자 내보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렸다.



그늘에 놓인 평상에서 남동생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고, 난 엄마가 대충 치우고 간 점심상을 정성들여 치웠다. 그리곤 집안 여기저기 청소를 했었다. 막내 여동생은 날 따라다니며 청소하는 흉내를 내곤 했는데, 그러다가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오빠가 적당히 돈을 쓰고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4시 이후였다. 오빠가 집에 들어오면 난 오빠를 따라서 밭으로 나갔다. 부모님께서 옮기고 난 고추모종에게 물을 줘야 했는데 그 몫은 우리 차지였다. 빗물을 받아 놓은 큰 고무다라에서 따듯하게 데워진 물을 조리개로 적당량을 옮겼다. 뜨거운 햇빛에 목이 구부러진 고추모종들은 신기하게도 우리가 준 물로 다시 살아나곤 했었다. 그렇게 오빠랑 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두어 시간 물을 주고 나면 기진맥진해졌다. 그런데 하루 종일 고추모종을 옮기신 부모님들은 얼마나 힘드실까? 어렸지만 그런 마음이 들었다.



5월의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주위는 이제 막 어둠이 내리려 할 때 고추모종은 끝났다. 그런데 그 풍경이 참 기가 막혔다. 엄마의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일렬로 줄을 선 여린 고추모종들과 곁에서 호위하는 튼튼한 나무 막대들, 그 둘을 아빤 분홍빛 테이프로 단단히 묶으셨다. 두둑을 덮고 있는 은빛 비닐위로 고추모종과 나무막대와 분홍빛 테이프 모두가 어우러져 장엄한 풍경을 연출했다. 오늘 하루 부모님의 노동이 멋진 풍경을 창조하셨구나, 흐뭇한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집에 들어오면 막내를 돌봐줬던 남동생이 모범생다운 인사를 건넸다.


“엄마아빠, 오늘 하루 힘드셨지요?”


“네가 오늘 힘들었겠구나! 막내 보느라.”


가족 모두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던 그 시절이었다.



그때 가장 바쁜 곳은 샘가였다. 종일 흙먼지를 뒤집어 쓴 엄마아빠는 몸을 바삐 씻으셨다. 아직은 물이 차가우므로 남동생이 미리 데워놓은 따뜻한 물을 섞어가며 몸을 씻으셨다. 엄마가 먼저, 아빠가 나중에 씻으셨다. 먼저 끝난 엄마는 저녁을 준비하러 달음질하듯 부엌으로 서둘러 가셨다.



엄마는 부엌에서 짧은 시간 동안 마술을 부리셨다. 햇감자를 썰어서 프라이팬에 볶고, 여린 상추를 살짝 양념장에 버무리며,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시고, 향긋한 취를 삶아 무치셨다. 그렇게 저녁 준비가 끝나면 밥을 푸짐하게 한 그릇씩 퍼 담아 상을 내오셨다. 오늘 하루 자식들의 배를 곯게 한 미안한 마음이 엄마의 손을 더 바삐 움직이게 하셨던 것 같다. 동그란 저녁상에 여섯 명이 모여 앉아 즐겁게 저녁식사를 했던 유년시절의 어린이날 풍경이다.



“오늘 하루 너희들이 애썼구나. 어서 밥 먹자.”


아빠의 말씀이 끝나면, 숟가락과 젓가락들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기억 저편에 있던 유년시절의 어린이날은 혼자 있는 나를 약간 슬프게 했다.



지금쯤 딸아이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어린이날 무엇을 추억할까? 모든 것들이 부족했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있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조화롭게 해냈던 그 옛날이 새삼 그리워진다.


(2012.5.5. 어린이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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