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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노잣돈 덧글 0 | 조회 3,381 | 2012-05-30 00:00:00
박인경 (박인경)  


저승 노잣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박인경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를 사랑했던 여인이 지켜보다 남자가 숨을 거두자 동전 두 닢을 양쪽 눈 위에 하나씩 얹고 ‘잘가요!’라고 말하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새로 개편된 영화 ‘벤허(Ben Hur)’의 한 장면이었다.


 



 20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무렵 나는 초등학생이던 두 아이들의 봄방학을 맞아 친정에서 쉬고 있었다. 며칠 머물던 까닭에 그분이 돌아가시는 과정과 장례식을 모두 지켜보게 되었고, 나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큰일이었다. 사는 동안 덕(德)을 베풀고 불교적 수행(修行)을 많이 하시어 그랬던지, 하루를 앓고 누우시더니 다음 날 저녁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자손들이 모일 시간만을 주셨던 것 같았다. 나흘의 애도 기간을 끝내고 염(廉)을 하는 모습도 지켜보았는데, 마지막으로 두 입술 사이에 10원짜리 동전 한 푼을 끼우는 것으로 형식이 끝났다.


 



 할아버지는 재산이 많았던 분이다. 어려웠던 시절 대학공부까지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야학(夜學)을 열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며, 마을과 집안의 발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취미로 창(唱)과 시조(時調)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기도 하셨는데, 그런 이유로 우리 집은 늘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논과 밭을 넉넉히 가진 부유한 지주(地主)였음에도 가을 추수가 끝난 뒤 어두워 질 때까지 논바닥을 들여다보며 떨어진 이삭들을 줍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내가 맏딸이어서 어른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할 때 행여나 밥풀을 흘리면 주워 먹게 하셨고, 철없던 내가 싫다고 하면 손녀가 흘린 밥알을 손수 집어 드시며, 농부가 쌀 한 톨을 얻으려면 허리를 여든 여덟 번 굽혔다 펴야 한다고 곡식의 귀중함을 말씀하셨다. 그렇게 자연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하며 알뜰하셨어도 남들에게는 베풀기를 즐겨 하셨다. 예전에는 ‘거지’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먹을 것을 얻으러 오곤 했는데, 그들이 찾아오면 할아버지는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밥과 반찬, 때론 쌀을 퍼 주시면서 빌어먹지만 말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라는 조언도 곁들이셨다. 매일 금전 출납을 모두 기록하셨는데, 한 번은 잘 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돈이 많으나 적으나, 인생의 마지막 장부는 똑같다는 말씀도 남기셨다.


 



 나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나이도 아니었다. 또 할아버지는 그렇게 현명하게 사시던 분이라서 그대로 영원히 사실 것이라고 믿었건만, 수명을 다 하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인 모양이었다. 저승으로 가는 과정과 그 뒤의 상황을 지켜본 나는 그때부터 잊고 있던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 종국에는 죽는 것이고, 잘 났거나 못 났거나 죽은 뒤에 가져 갈 것은 오로지 동전 한 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들은 할아버지의 한 말씀이 내 평생의 화두(話頭)가 되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형식은 좀 다르지만 저승으로 갈 때 노잣돈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니 가져 갈 것이라고는 한 닢의 동전뿐인가 보다. 나도 언젠가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겠지. 돌아 갈 때 가지고 갈 것은 노잣돈 한 푼인 것을 무엇을 그리 연연해 욕심을 부려야 하는가. 영화 한 편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보는 한낮이다.


 



                                                              (2012.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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